지옥에서 쌓아 올린 영혼의 수평 -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남긴 여운
우리는 흔히 극한의 고통 속에서는 인간성이 가장 먼저 마모될 것이라 생각합니다.하지만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저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그 편견을 조용히,그러나 단호하게 깨뜨립니다.소련의 강제 수용소(굴라그)라는,인간의 이름이 번호로 대체된 지옥 같은 공간에서 주인공 슈호프가 보낸'어느 운 좋은 하루'는 역설적으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고귀한 품격을 비춥니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새 나는 슈호프가 되어 차가운 수용소 식당에 앉아 있게 됩니다.배고픔은 이성을 마비시킬 법도 한데, 그는 서두르지 않습니다.무릎 위에 경건하게 모자를 내려놓고,보잘것없는 수프 한 그릇을 향해 온 신경을 집중하는 그의 모습은마치 성찬례를 집전하는 사제와 같습니다. 남들이 허겁지겁 국물을 들이킬 때,그는 숟가락 끝에 ..
운명이라는 거대한 파도 위에서 - 당신은 키를 잡았는가, 돛을 내렸는가?
"내 팔자가 그렇지 뭐."우리가 흔히 내뱉는 이 짧은 한마디에는 생각보다 무거운 '항복 선언'이 담겨 있다 .생텍쥐페리는 그의 저서 《아라스로의 비행》에서 날카롭게 지적한다. "불행을 운명의 탓으로 돌리는 순간, 우리는 삶이라는 비행의 조종간을 놓아버린 것이라고." 하지만 정말 그럴까?우리 삶은 때때로 거대한 폭풍우 같아서,나의 의지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분명 존재한다.그런데 재미있는 점은,똑같은 폭풍우를 마주하고도 누군가는 비명을 지르며 침몰하고,누군가는 그 바람을 이용해 돛을 올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수만 가지의 감정을 파도처럼 맞이한다.어떤 날은 세상을 다 가진 듯 긍정적이다가도,어떤 날은 발끝에 치이는 돌맹이 하나에도세상이 무너질 듯 부정적인 늪에 빠지기도 한다. 혹시 이런 경험 있..
"당신의 삶을 헐값에 넘기지 마세요" - '지금 당장'이라는 이름의 가스라이팅
"오늘이 마지막 기회입니다!","지금 결정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합니다."우리는 매일 이런 외침 속에 산다.쇼핑몰의 마감 임박 카운트다운부터,지금 당장 무언가를 배우지 않으면 도태될 것 같은 자기계발의 압박까지.세상은 온통 우리의 '다급함 본능'을 흔들어 깨우느라 혈안이 되어 있다.마치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이 내 인생의 전부를 결정지을 것처럼 말이다.하지만 잠시 멈춰 서서 심호흡을 해보자. 정말 그럴까? 우리의 뇌는 수만 년 전 사바나 초원에서 설계되었다.수풀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저것이 사자일 확률은 몇 퍼센트일까?"를 분석하던 조상들은 모두 사자의 점심 식사가 되었다.살아남은 건 일단 뛰고 보는 '다급한' 사람들이었다.문제는 오늘날 우리 앞에는 사자가 없다는 것이다.대신 교묘하게 설계된..
"돈은 훌륭한 하인이지만, 최악의 주인이다"
"돈은 훌륭한 하인이지만, 최악의 주인이다.'"– 프란시스 베이컨 돈은 단순히 지갑 속에 접힌 종이나, 스마트폰 화면 위에 떠 있는 숫자가 아니다.돈은 사람의 욕망과 공포를 먹고 자라며 커지는 거대한 에너지에 가깝다.이 에너지를 다룰 줄 아는 사람에게 돈은 충실한 하인이 되지만,무지하거나 방관하는 순간 돈은 주인의 자리를 넘본다.그리고 그때부터 우리의 시간과 감정, 선택권을 조금씩 잠식해 간다. 많은 사람이 말한다. “돈만 많으면 행복할 텐데.”하지만 이 문장에는 치명적인 함정이 숨어 있다.돈보다 영리해지지 못한 상태에서 쥐게 된 부는축복이 아니라 독이 든 성배가 되기 쉽다. 돈의 생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돈은 자유를 주지 않는다.오히려 불안을 키운다.잃을까 봐 잠을 설치게 만들고,더 벌어야 한다..
삶은 우리가 요청한 것만 준다
나의 임금(My Wage) - 제시 리텐하우스1페니를 두고 삶과 흥정을 벌였다.삶은 내게 더 이상 아무것도 주려 하지 않았다.얼마 없는 돈을 세어 보며 매일 저녁 아무리 빌어도 소용없었다.삶은 그저 고용주일 뿐이라 우리가 요청한 것만 줄 뿐이다.하지만 일단 받을 돈을 정해 놓고 나면 힘들어도 할 일은 해내야 한다.나는 보잘것없는 임시직일 뿐이었다.알게 되자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삶에게 얼마나 많은 돈을 요구하든 삶은 기꺼이 내주게 되어 있거늘.- 매일 아침 알람 소리에 눈을 뜨고,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며, 주어진 업무를 성실히 해치우는 우리들의 모습은 참으로 숭고하다.하지만 문득 밤늦게 돌아오는 길,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 살았는데, 왜 내 삶은 늘..
박찬욱의 미장센보다 잔혹했던, 어느 평범한 가장의 ‘피투성’
우리는 때로 거장의 이름 앞에 냉소적이 되곤 한다.박찬욱이라는 이름이 주는 특유의 탐미주의적 폭력성과 인위적인 구도는누군가에게는 찬란한 예술이지만,누군가에게는 피로한 허세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랬다. 넷플릭스 화면 속 를 재생하며,나는 일종의 방어기제를 세웠다.‘이번에도 그저 화려한 지옥도겠지’라는 무심한 기대감으로 말이다. 영화의 중반부까지는 예상대로였다.박찬욱 특유의 차가운 미장센과 집요한 카메라 워킹은 여전했다.그러나 극이 후반부로 치닫고,이병헌과 손예진의 일그러진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우기 시작할 때,나의 방어기제는 무너졌다.그곳에는 거장의 스타일이 아니라,살아남기 위해 벼랑 끝으로 등 떠밀린 인간의 비명이 있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상에 ‘던져진 존재(Gewo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