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해버린다면 어떨까요?
어둠이 아니라 눈부신 백색의 공포가 찾아오는 순간,
우리가 쌓아올린 문명은 단 며칠 만에 무너져 내립니다.
오늘은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조제 사라마구의 걸작,
『눈먼 자들의 도시』를 통해 인간의 본성과
현대 사회의 민낯을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이야기는 도로 한복판에서 차를 몰던 한 남자가
갑자기 시력을 잃으며 시작됩니다.
특이하게도 그가 본 세상은 암흑이 아닌
우유를 부은 듯한 '백색 실명'이었습니다.
이 전염병은 순식간에 도시 전체로 번지고,
정부는 공포에 질려 눈먼 자들을
폐쇄된 정신병원에 격리합니다.
아비규환이 된 수용소 안에서
유일하게 눈이 먼 척하며 남편을 따라온
'의사의 아내'만이 모든 비극을 목격합니다.
배설물로 뒤덮인 복도,
굶주림 속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성적 유린...
작가는 시각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감각을 앗아감으로써,
인간이 얼마나 쉽게 짐승의 상태로 추락할 수 있는지를
처절하게 묘사합니다.
하지만 그 지옥 같은 풍경 속에서도
의사의 아내는 타인을 돌보고 연대하며
'인간다움'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줍니다.
이 압도적인 서사를 만들어낸 조제 사라마구는
포르투갈 출신의 작가로,
75세라는 늦은 나이에 노벨 문학상을 거머쥐었습니다.
그의 문체는 독특하기로 유명합니다.
대화창도 없고,
마침표와 쉼표만으로 길게 이어지는 문장은
마치 독자가 숨 가쁜 재난의 현장에
직접 들어와 있는 듯한 몰입감을 줍니다.
그는 평생을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권위주의와 부조리를 비판해 왔습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도
인물들에게 이름을 부여하지 않고
'의사', '안경 쓴 여자' 등으로 부르는데,
이는 이 비극이 특정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비극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이 작품이 발표되었을 때,
전 세계 독자들은 경악과 찬사를 동시에 보냈습니다.
단순히 재미있는 소설을 넘어
'인간성에 대한 사회 심리학적 보고서'라는 평가를 받았죠.
특히 2008년 줄리안 무어 주연의 영화로 제작되면서
대중적인 인지도는 더욱 높아졌습니다.
많은 비평가는 이 소설이
현대 사회의 취약한 시스템을 예견했다고 입을 모읍니다.
재난 상황에서 국가 시스템이 얼마나 무기력하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인간이 집단 이기주의에 빠졌을 때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이 책이 다시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랐던 현상은,
우리가 여전히 사라마구가 경고한
'보이지 않는 공포' 속에 살고 있음을 증명합니다.
작가는 작품 말미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눈이 멀어 있었고,
지금도 눈이 멀어 있다.
볼 수는 있지만 보지 못하는 눈먼 사람들이다."
이 문장은 현대인들에게 뼈아픈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정보를 접하지만,
정작 곁에 있는 타인의 고통이나 사회의 부조리에는
눈을 감고 살고 있지는 않나요?
이 작품이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가치는
'공감의 회복'과 '연대'입니다.
의사의 아내가
끝까지 시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타인의 아픔을 목격하고
책임지려는 의지를 가졌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육체적인 눈은 뜨고 있어도
마음의 눈이 먼 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라마구는 묻습니다. 당신은 진정으로
세상을 '보고' 있느냐고 말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