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로 보는 세상 / / 2026. 1. 31. 00:00

박찬욱의 미장센보다 잔혹했던, 어느 평범한 가장의 ‘피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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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때로 거장의 이름 앞에 냉소적이 되곤 한다.
박찬욱이라는 이름이 주는 특유의 탐미주의적
폭력성과 인위적인 구도는
누군가에게는 찬란한 예술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피로한 허세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랬다. 넷플릭스 화면 속
<어쩔 수 없다>를 재생하며,
나는 일종의 방어기제를 세웠다.
‘이번에도 그저 화려한 지옥도겠지’라는
무심한 기대감으로 말이다.
 
영화의 중반부까지는 예상대로였다.
박찬욱 특유의 차가운 미장센과
집요한 카메라 워킹은 여전했다.
그러나 극이 후반부로 치닫고,
이병헌과 손예진의 일그러진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우기 시작할 때,
나의 방어기제는 무너졌다.
그곳에는 거장의 스타일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벼랑 끝으로 등 떠밀린
인간의 비명이 있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상에 ‘던져진 존재(Geworfenheit)’라고 정의했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해서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며,
우리가 처한 고통스러운 상황 역시
우리가 설계한 것이 아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마주한 파국은
그들이 악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 상황 속에 ‘던져졌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병헌의 눈빛은 살의가 아니라 절망을 담고 있으며,
손예진의 떨리는 손길은 죄책감이 아니라
보호 본능의 산물이다.
그들이 선택한 극단적인 행동들은
도덕적인 잣대로 재단하기 이전에,
인간이라는 종이 지닌 가장 원초적인 생존 본능을 자극한다.
그 순간, 관객은 관찰자가 아닌 공범자가 된다.
"당신이라면 저 상황에서 다르게 행동할 수 있겠는가?"라는
영화의 서늘한 질문 앞에서 우리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제목 <어쩔 수 없다>는 언뜻 보면
무기력한 체념처럼 들린다.
하지만 영화를 끝까지 지켜본 이들에게
이 말은 가장 처절한 능동태로 다가온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욕구를 '코나투스(Conatus)'라 불렀다.
주인공들이 벌이는 그 기괴하고도 처절한 사투는,
사실 자기 자신과 가족을 지키려는
코나투스의 극단적인 발현이다.
영화의 결말을 보고 나면 깨닫게 된다.
그들의 행동이 ‘어쩔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약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상황을 견뎌내고 해결하려는 의지가
너무나 강력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괴물이 되기로 선택한
인간의 모습은 비극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지독하게 인간적이다.
 
박찬욱의 스타일은 이번에도 날카로웠지만,
그 날 끝에 맺힌 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연민’이었다.
이병헌과 손예진의 연기는
스크린의 질감을 넘어 관객의 폐부 깊숙이 박힌다.
그들이 내뱉는 무언의 비명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귓가를 맴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에서
‘어쩔 수 없는’ 순간들을 마주하며 산다.
도덕과 생존 사이,
평범함과 비범함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우리에게 이 영화는 묻는다.
당신의 삶을 지탱하는 ‘어쩔 수 없는’ 진심은 무엇인가.
 
영화 <어쩔 수 없다>는 단순한 스릴러가 아니다.
그것은 벼랑 끝에 선 인간이 스스로에게 건네는
가장 잔혹하고도 뜨거운 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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