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둘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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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늘 ‘확실함’을 갈망한다.

어떤 사람은 옳고, 어떤 사람은 틀리고.

어떤 나라는 선진국이고, 어떤 나라는 후진국이고.

어떤 삶은 성공이고, 어떤 삶은 실패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이렇게 나누어버리면 세상은 훨씬 이해하기 쉬워진다.

복잡한 맥락을 파고들 필요도 없고, 눈앞의 혼란을 견딜 필요도 없다.

하지만 이 단순함의 대가로 우리는 세상의 결을 잃어버린다.

간극본능,세상을 둘로 나누어 이해하려는 이 본능은

결국 우리가 봐야 할 풍경을 좁혀버린다.

 

가끔 뉴스를 보면 마치 세상이 둘 중 하나의 선택지만 있는 듯하다.

‘경제 위기냐 회복이냐’, ‘전쟁이냐 평화냐’, ‘성공이냐 파멸이냐.’

자극적인 헤드라인일수록 이분법의 구조는 더 선명해진다.

그러나 뉴스가 보여주는 극단은 전체의 한 부분일 뿐이다.

뉴스는 극적이고 비극적인 순간을 전면에 내세우고,

우리는 그 강렬함에 압도되며 세상의 전체를 그렇게 믿어버린다.

마치 거대한 산맥을 보면서 가장 높은 봉우리 하나만 보고

“산은 모두 저런 모양이야”라고 단정하는 것처럼.

 

하지만 실제 세계는 훨씬 다층적이다.

가난과 부유함은 절대적으로 나뉘어 있지 않고,

늘 경계선 위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성취와 실패도 그 둘 사이에서 매일 흔들리며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과 닿아 있다.

나라들의 발전 수준도 선이나 후라는 단순한 선 위에 놓이지 않는다.

대부분은 한 걸음씩 발전하거나 멈칫하거나, 때때로 후퇴하면서 긴 곡선을 그린다.

우리는 늘 중간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극단을 선호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불확실함은 불안을 낳고, 불안은 우리가 견디기 힘든 감정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단순화한다.

‘저 사람은 나쁘다’라고 단정하면 더 이상 이해하려 할 필요가 없고,

‘저 사람은 성공했다’고 말하면 그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과정과 흔들림을 보지 않아도 된다.

단순화는 편안함을 준다.

하지만 그 편안함이 바로 현실을 왜곡하는 가장 위험한 지점이다.

 

간극본능을 벗어나려면 세상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구분하려는 본능이 올라올 때 잠시 멈춰 서서 생각하는 것이다.

‘정말 둘 중 하나인가?’, ‘이 중간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존재할까?’

뉴스가 말하는 극단을 보면서 ‘이건 전체의 몇 퍼센트일까?’라고 질문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 걸음 떨어져 세상을 바라보면, 보이지 않던 결이 나타난다.

사람들 사이의 복잡한 감정, 국가들의 장기적 변화, 개인의 삶이 만들어내는 굴곡들.

세상은 늘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간극을 메우는 것은 거창한 이론도, 대단한 지식도 아니다.

단지 ‘세상은 둘 중 하나가 아니다’라는 단순하지만 깊은 이해다.

그 이해가 생기면, 세상을 대하는 우리의 방식도 조금씩 변한다.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유연해지고, 상황을 해석하는 시선이 넓어지며,

변화의 흐름을 읽는 감각이 깊어진다.

더 나은 판단은 더 넓게 보는 데서 시작된다.

우리는 극단이 아니라, 그 사이의 세계를 살아간다.

그 중간의 세계를 볼 줄 아는 능력,

그것이 세상을 조금 더 온전히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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